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스팅스 반다 (문단 편집) ===== 오튼 치르와 부부 납치 사건 ===== [[19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탄자니아]]에 망명해 '말라위 자유 운동'이라는 망명 정당을 세우는 등 반반다 운동을 하던 중 딸을 만나려 북부 [[잠비아]]로 가던 오튼 치르와[* Orton Chirwa, 1919~1992. 말라위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었으나, 독립 직후에 사임하고 탄자니아로 망명했다.] 부부를 말라위 보안군이 납치해 말라위로 끌고 가고는 이들이 '정부를 전복하려고 잠비아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치르와 부부는 위조된 문서를 '자필 진술서'로 뒤집어씌운 불공정한 수사를 거친 후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 앞에서 변호사와 증인도 부를 수 없는 데다가 법원에 심문하는 것도 금지된 불공정한 재판을 거쳤고, 2달간의 재판 끝에 1983년 5월에 이들 부부 2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반다는 이 형량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못 이겨 1달 만에 이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게다가 치르와 부부와 동행하던 아들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된 후 1984년 2월까지 감금당했다. 오튼 치르와는 독방에 감금된 채 다른 독방에 수감되었던 아내를 만나는 것조차 금지당할 정도로 외부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다리가 사슬에 결박된 적도 여러 번이나 있었고, 결국 치르와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백내장]]으로 실명하고 부분적으로 귀가 먹게 되었다. 그나마 1992년 11월에 영국 법률 전문가 대표단이 말라위에 오면서 치르와 부부는 잠시나마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나, 결국 오튼 치르와는 1992년 12월 20일에 향년 73세로 [[옥사]]한다. 참고로 치르와의 부인이던 베라 치르와[* Vera Chirwa, 1932~. 말라위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다.]는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남편의 사망 1년 후인 1993년 1월 24일에야 석방되었다. 참고로 베라 치르와는 석방 후에 사형 폐지 운동을 벌이고 반다의 후임 정부에서도 인권과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나갔으며, 2006년부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 대학의 인권 센터에서 '진정한 아프리카 인권 변호사를 가장 잘 대표하는 개인에게' 베라 치르와 인권상을 수여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